전직 동장께서도 열 받았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이다

지난 14일(수) 오후 4시50분경 본보에는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본보 독자이자 전직 동장이라고 밝힌 김모씨는 제일고 앞, 인도에 회향목 나무를 심었다가 다시 파내고 있다면서 도대체 그곳에 무엇을 또, 가져다 심으려고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항변하며 신문사가 나서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만약 이것이 제 돈이고 자기들 살림살이이면 그렇게 할 수가 있겠느냐고 열변을 토했다는 것.
그러면서 그는 모 시의원에게도 얘기했더니 신문사에게 연락해서 이 문제를 보도하도록 했다고도 전했다.
또한 그는 우리 때는 정말 밤낮으로 뛰었다고 말하면서 지금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하며, 시골 노인들이 농사를 짓고 있는데 고라니들이 농작물을 다 망쳐놓고 있는데도 이런 것 하나도 제대로 처리를 못해 주는 답답 폭폭한 공직사회와 시정을 꼬집었다고도 말했다.
지지난 주에는 장사를 한다는 한 시민 역시 코로나19로 장사도 안되고 죽을 맛인데 그것도 봄날 우중충한 라벤다를 지켜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더 터진다는 항변의 소리도 전해왔다.
어쨌든 요즘 자치단체나 국가가 국민의 소리에 귀를 제대로 쫑긋해 듣지를 못하는 듯 싶다. 걸핏하면 사생활 보호와 인권만을 거론하면서 공직자의 본분을 망각하고 계시는 분들과 이기적인 생각으로 왜,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지도 모르는 분들 때문에 보통의 시민들은 속이 상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시청을 찾은 민원인들이 지금, 우리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왜, 열받아 있는지에 대한 관계자들의 진지한 고민과 귀 기울임이 필요한 때이다. 
오죽이나 답답했으면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까지 본보에 전화를 걸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정 운영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을까도 싶다. 그의 열받음은 작금에 보여진 도로변 화단 정비와 꽃박스 때문만은 아닐 듯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요즘 전반적으로 국민 여러분들의 기분은 썩 좋지가 못하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고 경제적인 불황과 LH사태 이후, 민심의 이탈 등은 국민을 지치게 만들고 힘들게 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국민을 감동시키는 일들이 우리 동네서만이라도 많았으면 싶다. 특히 공직자는 국민의 공복으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힘써야 맞다. NO보다는 긍정인 YES라는 답을 내놓으려는 노력도 더 필요하다. 
유시장이 밝힌대로 현장에서 답을 찾고 오로지 국민과 국가를 위해서 애쓰고 있다는 감동적 드라마를 연출해 내는데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공직자의 책무이자 본분인 것이다.

 

필자가 나누고 베푼 기억은 미약하고 까마득한데 
그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18일(일)은 필자에게는 매우 기쁜 특별한 날이었다. 76년도 77년도인가 그러니까 군대를 다녀오기 전?에 5살 연하인 남동생 친구들인 중3생들에게 영어와 수학 공부를, 잠시 가르치는 선생이 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필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후배인 동생이 신문사로 나를 찾아왔다. 까마득한 옛날의 고마움과 즐거움을 간직한 채, 동안 살아오다가 일요일인 오늘 오전 첫 번째 만남을 신문사 사옥서 가진 것이다.
나의 기억보다도 광주서 (주)남광글라스 라는 상호로 중소업체를 운영하는 그의 기억이 더 또렷했으며 매우 새로웠다. 잊지 않고 찾아준 나름의 성공한 후배동생이 그저 필자에게는 반갑고 고마울 뿐이다.
필자가 나누고 베푼 기억은 미약하고 까마득한데 그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공부를 하다가 내장 쪽으로 대나무 낚시대를 들고, 고기를 잡으러 다녀왔던 그런 기억들까지 세세하게 그는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그는 광주서 거주하면서도 정읍신문을 10년 이상을 꾸준히 구독해 왔다. 필자를 동명이인으로만 기억했다. 그러다가 최근에서야 확실하게 확인이 됐던 모양이다. 그리고 며칠 전 사내 전화 통화로 연결돼 우리는 오늘, 이렇게 만나 옛 추억들을 정리해 나갔던 것이다.
우리는 그날 점심 이후에도 커피타임까지 갖고서 헤어졌다. 그리고 그날 그가 살아온 환경과 결혼 후, 잘 키워낸 두 자녀의 얘기도 함께 들을 수가 있었다. 
또한 올해가 그의 환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세월에 빠름과 열심히 살아온 성공한 후배동생이 자랑스러웠다.
정읍도 자주 내려오고 있는 만큼 이제는 그가 필자와함께 할수 있는 일도 찾아보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진실된 언행에서 고향이라는 포근한 단어를 새삼 떠올리게도 됐다.
그는 우리의 다음 기약에 적잖은 의미를 더하는 설래임을 남겨 두기도 했다. 
아무튼 그날은 정말, 필자에게는 매우 뿌듯하고 행복한 날이었다. 열심히 나누고 베풀면서 살다보니까, 이런 기쁜 날도 있구나도 싶었다.
필자도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미뤄두고 망설였던 은사와 고마움 분들을 찾아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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